문병란 시인의 〈꽃씨〉
상태바
문병란 시인의 〈꽃씨〉
  • 김경남 기자
  • 승인 2020.10.15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 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 가을은 이별의 계절입니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소중한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의 계절입니다.

뜨겁고 열정 가득했던 빛나던 여름을 보내며 한껏 성숙해진 숲은, 인고의 겨울을 견뎌내고,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봄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떠나보낼 준비를 합니다.

눈부시게 빛나던 여름날, 그 햇살을 제 몸에 간직했던 숲은 이제 그 고운 빛깔로 이별을 위한 고운 수의를 준비합니다.

꽃들은 여름날 아침이슬에 머물던 반짝이던 햇살 한줌으로 제마다 곱디고운 빛깔의 예쁜 꽃을 피웁니다. 나무들도 자신이 잉태한 잎들과의 이별을 위해, 제 몸에 간직했던 한 여름 뜨거운 햇살을 뽑아내 붉디붉은 빛깔로 아름다운 수의를 준비해 줍니다.

꽃은 꽃씨로, 나무는 과실로, 지난봄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며 땅속까지 스며든 봄비의 촉촉한 감촉과 그 봄비가 만든 길을 따라 땅속까지 퍼져 흩어지며 겨울잠을 깨우던 따사로운 봄 햇살의 간지러움, 한여름 타오르던 뜨거운 햇살과 온 몸을 뿌리 채 흔들고 지나간 폭풍, 그리고 수많은 밤 어둠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고요히 반짝이던 별빛들. 숲은 그 모든 시간의 기억을 작은 씨앗에 남겨 새로운 봄을 준비합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도 숲을 이루는 꽃과 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엽락분본(葉落糞本), 겨울날 까치밥으로 감나무에 감하나 남겨두는 마음, 스스로를 떨구고 버려 섞어 기어이 다시 나무의 거름이 되는 낙엽의 마음, 그 마음이 봄을 꿈꾸며 인고의 겨울을 견뎌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1)석과불식(碩果不食) : 큰 과실은 종자를 위해 먹지 않고 남겨둔다.

2)엽락분본(葉落糞本) : 떨어진 잎이 섞어 나무의 거름이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