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관리부실로 잡풀 무성한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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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관리부실로 잡풀 무성한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지’
  • 김경남 기자
  • 승인 2020.09.16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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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순절지 안내판, 순절지 나몰라라 방치

외암천이 온양천과 어우러져 뒤척이며 흘러가다보면 평촌냇가(온양천) 오른쪽 주택 사이로 돌로 세워진 기념비가 보인다.

기념비가 서있는 곳이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지.

이남규 선생은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으로 낙향했다.

1906년 홍주의병에 선봉장으로 임명됐으나 홍주성에는 입성하지 않았다. 홍주의병이 홍주성전투에서 패하자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고,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일이 사전에 누설돼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1907926일 기마대를 파견하여 이남규 선생을 서울로 압송했다.

이남규 선생이 일본 기마대에 체포돼 끌려가실 때 사가살 불가욕(士加殺 不可辱 : 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일본 기마대는 압송 도중 역말인 아산 외암동(현 송악면 역촌리)에서 벼슬자리를 주겠다며 선생을 회유했다. 그러나 선생이 뜻을 굽히지 않자 일본도를 뽑아 선생을 살해했다. 아들 이충구(李忠求)는 이를 막기 위해 뛰어들어 먼저 살해됐고, 가마를 들었던 노비 김응길, 가수복도 칼을 맞았다. 가수복은 12곳의 자상을 입고도 살아나 이를 증언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6년에 이남규 부자 순국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고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의 땅이라는 기념비를 건립했다.

16일‘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지’를 찾았다.

순절지 안내문 글귀는 빛에 바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벗겨져 있었고, 기념비 주위는 8.15 광복절에도 풀조차 안 깎은 듯 개망초가 무성했다.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지는 신정호 매점 한 구석에 마련된아산 항일민족운동 자료 전시관에 이어 아산시가 항일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유적지를 어떻게 대하고 방치하고 있는지 그 민낯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관련기사 : 아산시에 있어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아산 항일 민족운동 자료 전시관' http://www.asanin.kr/news/articleView.html?idxno=1388)

이렇게 방치할거면 차라리 기념비를 세우지나 말던지, 그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엘크들의꺼어억’ ‘끼에액’하는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순절지 바로 옆 사슴목장의 악취가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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