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가을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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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의 〈가을볕〉
  • 김경남 기자
  • 승인 2020.09.10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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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 6월의 폭염과 7월에서 8월까지 이어진 지리한 장마, 그 뒤를 이은 초대형 태풍들.

장마와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물에 쓸리고 잠기고, 바람에 찢기고 날아가 곳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와 상처가 남았다. 상처받고 아픈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감싸며 수해복구에 나섰지만 아직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복구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수해와 태풍피해는 모두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간들의 것이다. 자연에게 있어 장마와 태풍은 봄에서 여름을 지나 가을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단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자연의 물리적 현상이 더욱 커졌을 뿐 가을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낮과 밤의 큰 일교차로 맑은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97)가 지났다.

이제부터는 '가을의 시간이다'

'가을의 시간'에 시인은 뜨거운 여름 햇살을 머금어 열기 가득한 고추를 따다 마당 한가득 널어놓는다.

가을볕은 고추가 머금고 있던 뜨거운 열기를 서서히 태우고 가라앉혀 깊은 맛이 배이도록 숙성시킨다. 그렇게 고추는 가을볕에, 머금고 있던 여름 햇살을 태우고 삭힌다. 여름의 붉은 뜨거움이 가을볕을 닮아 투명한 검붉음으로 마름할 때까지.

시인이 고추를 널어논 마당 위 빨래줄에는 언제 널어 놓았는지 빨래가 푸른 하늘을 향해 눈부시게 흔들리며 말라가고 있다. 시인은 눈부시게 말라가는 빨래를 보며 슬픔에, 상처난 욕망에, 지쳐 시들어가는 자신의 몸도 함께 말린다.

말리는 것과 시드는 것은 다르다. 말리는 것은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볕에 세균과 곰팡이를 태워, 겉과 속이 같은 고운 제 빛깔을 찾아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시드는 것은, 겉은 그대로인 것 같으나 안에서는 곰팡이가 피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현상이다.

이 가을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시들어 가는 몸과 마음을 말려보자.

지치고 힘든 삶의 시간속에서 우리 몸과 마음에 생겨난 크고 작은 생채기와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자 그리고 눈부신 하늘을 향해 널어 가을볕에 말려보자.

우리 몸과 마음이 눈부신 푸른 하늘에 감싸이고, 싱그런 가을바람의 향을 입어, 풍요로운 황금들판으로 곱게 물들어,  고운 제 빛깔을 찾아 투명하게 빛날 때까지 가을볕에 말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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