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곶창지 발굴 통해 조선시대 조세창고 실체 확인
상태바
공세곶창지 발굴 통해 조선시대 조세창고 실체 확인
  • 김경남 기자
  • 승인 2020.09.07 08: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아산 공세곶창지 발굴 1차 조사 성과 -
공세곶창지에 남아있는 삼도해운판관선정비
공세곶창지에 남아있는 삼도해운판관선정비

아산시는 공세곶창지가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조창 중심시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이뤘다.

조선시대에는 세()로 걷은 곡식을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공진창(貢津倉)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425(세종7)에 공세곶(貢稅串)은 조창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貢稅串(공세곶)이라는 명칭을 보아 조창은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78(성종9)부터는 당진 범근내 조창을 통합했다. 1523(중종18)에는 세곡의 관리를 위해 창고 80칸을 지었다. 이때부터 공진창(貢津倉)이라고 했다.

1631(인조9)에 돌로 둘레 380, 높이 5.5척의 창성(倉城)을 쌓았다. 조창에 성곽을 쌓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공세곶창지가 유일하다.

공진창이 가장 활발할 때는 금산을 제외한 충남 전 지역과 평택, 옥천, 청주 등 40개 고을의 세곡이 모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곡 수집과 운반이 민간상인에게 위탁되기 시작하면서 공진창의 기능이 점차 축소됐다. 1800년대 중반에는 쌀 대신 돈으로 세금을 걷어 들이면서 조창의 기능을 상실했다

현재는 조창의 성곽 약 350m가 잔존되어 있으며, 조창의 책임관이었던 삼도해운판관 선정비 9기만이 보존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는 유구한 역사성과 문화재적 중요성을 가진 공세곶창 관리의 시급함을 인식, 2019년 공세곶창지 종합정비기본계획 수립 후 이번 발굴조사를 추진했다.

공세곶창지 내부 북동쪽 지역 4,691제곱미터를 대상으로 한 이번 1차 발굴조사를 통해 여러 문헌과 고지도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봉상청과 창고 등 조창 중심시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또한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곳에만 축조된 창성 축조기법의 특징을 처음으로 파악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시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창성 내·외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종합적인 분석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조선시대 대표적 조창 유적인 공세곶창지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가 올바르게 자리매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세곶창지 발굴 현장
공세곶창지 발굴 현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